<연재>조관형의 백두대간 -29- 돌도 모여 있어야 탑이 되고
닭목령 - 대관령 13.6km

사는 것이 미안함을 쌓아가는 일이 되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살게 되었을까
사람에게 미안한 것은 오직 산에서만 용서 받는다
이젠 업보(業報) 때문에라도 산에 가지 않을 수 없다
방면 받는 심정으로 능선을 걷곤 한다. ( 배문성 ‘등산‘ 전문)
몇 년째 백두대간 종주를 하고 있다는 시인의 느낌도 지금 우리와 같았을까. 백두대간 종주 길을 떠난 지도 3년 째, 시인은 업보(業報) 때문이라지만 그런 느낌은 들었어도, 꼭 그렇다고 수긍하기는 힘들다.
대간 종주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던지는 질문이 하나 있다.
왜 대간 종주를 시작했는지, 그리고 꼭 그 때 떠나야만 했는지, 그리고 백두대간 종주라는 것이 꼭 필요 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종주가 끝나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 런지... 그러나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냥 길 위에서 서성대는 날들이 좋아서였다고, 이 나이에 그냥 살아가기에는 왠지 답답하고,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느낌 때문에, 혹시 백두대간을 걷고 나면 또 다른 길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아니 백두대간 종주가 또 다른 삶의 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길을 떠났다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기도 했다.
저 산을 오르면 또 다른 산을 도전하고 한 코스를 끝내면 다른 코스를 물색하고 그렇게 산을 오르다 시작된 것이 백두대간 종주였는데... 이 종주가 끝나면 또 무엇을 하게 될 것인가.
굳이 가지 않아도 될 길을 스스로 만들어서 내가 원하는 산을 계속 찾아 갈 것이다. 그런 산과 현실과의 불협화음을 조장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만족해하고... 그로인한 고통까지 흔쾌히 받아드리고 그런 반복적인 행태의 도전이 언제 끝날지 모를 일이다.
처음으로 히말리아 에베레스트를 오른 영국의 산악인들은 요즘 우리나라 일부 산악인들처럼 등산, 그 자체가 생활의 방편이 되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비교적 부유층 출신이었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될 산을 오르던 사람들이다. 그렇게 산과의 도전이 시작되면서 최고봉 등정에 한 획을 그었던 그들은 세계 등산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우리가 대간 종주를 끝낸다고 해서 그들처럼 인생이 바뀌는 것은 아닐 터... 막대한 시간과 엄청난 정열이 수반되는 행위임에도 개인적으로 성취감하나 남기는 정도가 될 것이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최근 백두대간 종주가 여러 형태의 극한 체험을 할 수 있고 치열한 명상의 시간을 갖을 수 있다는 것과,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라는 생의 마지막 ‘버킷리스트’(bucket list)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백두대간종주가 현실적으론 크게 도움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대원들은 종주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쓸모없다는 대간종주를 정당화하기 위해 크기가 워낙 커서 재목으로 쓸 수 없다는 장자의 상수리나무(櫟)우화를 예로 들면서, 쓸모없음으로 오히려 천수를 누리게 된 상수리나무를 빌어 위로하기도 했다.
나무 목(木)변에 즐거울 락(樂)을 붙인 상수리나무 역(櫟)자는 그 본뜻조차 ‘쓸모없음을 즐겁게 생각하는 나무’라 했으니, 장자는 누구보다도 쓸모없음의 쓸모를 중히 여긴 것 같다. 경계(境界)를 중시한 장자의 진면목이다.
때문에 대간종주를 하다보면 그렇게 터무니없는 행동들이 인간을 좀 더 인간답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은 전혀 쓸모없이 느껴지는 백두대간 종주 경험이 남은 삶을 더 풍성하게 하리라는 상상도 해보았다.
마치 성서에서 언급한 ‘집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Cornerstone)’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길을 떠났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산을 좋아하는 산악인들의 마지막 ‘버킷리스트’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백두대간 종주’ 일 것이다.
한 해에도 대간종주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대략 1만 여명(?)이나 된다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출입금지구역(7개 구간, 거리 약 80km)에 신경 쓰지 않고 편한 마음으로 대간 종주를 하는 것이 ‘소박한 꿈’임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명리학자 조용헌 교수의 지적처럼 건강을 위해 땀이나 흘리려고 떠난 통즉등산(通則登山)이던, 아니면 삶이 궁지에 몰렸을 때 그 해답을 모색하려 했던 궁즉등산(窮則登山)이던지, 묻고 싶지만 그것 역시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나 역시 더 이상 늦기 전에, 내 생애 가슴 뛰는 일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길을 떠났을 뿐이다.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감동시키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 ‘감동하는 삶’은 가난한 이 땅의 샐러리맨들에게 있어서 영원한 꿈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백두대간 종주는 뒤늦게 찾은 생의 마지막 ‘버킷리스트’같은 것이다. 대간종주는 스스로 버킷을 딛고 올라서서 자신의 두발로 툭 차버리면(kick the bucket), 그냥 허공에 매달리고 마는 절체절명의 일처럼 켜켜이 쌓인 일상의 먼지를 털어버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때문에 대간 길은 언제나 긴장과 기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쯤 걸어왔으니 산을 놓아주고 싶다.
더 이상 산을 핑계로 삶을 변명하고 싶지 않다. 많은 백두대간 종주 자들처럼 걸어 온 날들에, 감사드리고 싶다. 남은 길 역시 그냥 몸으로 보고 듣고 부딪히면서 길을 걷고 싶을 뿐이다.
그런 길 위에서 쓸모없는 것이 있다면 잡다한 생각들이다.
생각이 많으면 길은 힘들어진다. 다행이도 길은 그 생각을 다독여 주곤 한다. 그래서 산이다. 계절은 어김없이 다시 봄이 찾아왔다.
닭목령 산세는 완만하고 길은 봄비에 젖어 부드럽다.
초록빛 산죽과 흰 눈은 아름다운 길을 만들었다. 흰 바탕에 초록 길섶으로, 대칭되는 색감만으로도 길은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이다.
양지바른 골짜기엔 벌써 노란 생강나무가 꽃망울을 맺기 시작했다. 가지를 꺾으면 알싸한 생강냄새가 난다하여 생강나무다.
고향이 춘천인 소설가 김유정의 단편소설 ‘동백꽃’의 동백은 강원지방에서 ‘동박’이라 불리는 생강나무의 다른 이름이다.
노란 동박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풍년이 온다고 했다. 그 열매로 짜낸 기름이 동박기름이다. 꽃이 피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혀 향긋한 그 냄새에 정신이 아찔해진다’는 소설 속 구절처럼 시골 처녀의 풋풋한 향기와 열매가 익으면 성숙한 여인의 머릿결 냄새가 묻어나는 나무다.
진달래도 피어났다. 꽃 색깔이 짙어 진달래다. 이래저래 봄 산은 소식이 많고 볼 것도 많아 봄이다.
거의 1시간이나 걸었을까, 목장을 지나 첫 왕산쉼터에 도착하니 비는 싸락눈으로 바뀌면서, 고도가 높아졌다고 싸락눈이 날리면서 계절은 다시 깊은 겨울을 불러들이고 있다.
눈은 겨울이 남긴 흔적이다. 산은 아직도 그 흔적 속에 파묻혀 있다. 바람조차 없으니 온 세상이 잠시 멈춰 선 느낌이다.
눈 내리는 산은 텅 비어있다. 비어있음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다. 배우는 것 보다 아끼는 것이 힘든 것이 말이라 했는데, 그 침묵 속으로 빠져든 강설(降雪)풍경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비탈면에 서 있는 한 그루 소나무 정경(情景) 때문이다.
‘아 - 아름답다 !’
탄성이 절로 흘러 나왔다. 추사(秋史)김정희가 환갑을 앞둔 나이에 제주도 귀양지에서 그린 세한도(歲寒圖)풍경이 저랬을까. 아름다운 절경은 그냥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추사는 단지 그 아름다움을 그리려 老松을 택하지 않았으리라.
낙목한천의 겨울에 상청(常靑)의 세한도(歲寒圖)는 ‘그 사람에 그 그림(其人其畵)’이 되었다. 거친 붓이 스쳐지나 간 것 같은 인고의 세월, 세한도는 추사 자신의 자화상이었다.
소나무는 줄기가 붉은 적송(赤松)이다.
흰 눈이 쌓인 산속에서 줄기가 붉고 곧게 자란 소나무를 보면, 늘씬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여인이 연상된다. 그래서일까, 적송의 또 다른 이름은 미인송(美人松)이다. 나무도 잘생기면 미인소리를 듣는가 보다.
닭목령에서 고루포기산(1,238m)까지는 약6km, 2시간 거리이다.
크게 심호흡 하며 쉴만한 곳도 고루포기 앞 능선 봉우리(1,210m)이다. 눈이 내렸음에도 산길은 편안하고 빠르게 달아난다.
고루포기 산으로 이어지는 해발 1천 미터 산 능선 위에 떡메 칠 때 쓰는 떡판을 말하는 ‘안반‘과 고원지대 평평한 땅을 의미하는 ’덕‘을 이곳사람들은 ’‘안반데기’로 부르니, ‘안반덕’은 도암면과 왕산면 경계지로 삼척 귀네미골, 태백 매봉산과 함께 3대 고랭지 채소 재배단지로 알려진 곳이다.
그 면적이 60여만 평이라 하니 가히 천상의 평원이 된다. 그 널따란 분지에 겨우내 내린 흰 눈이, 마치 큰 소쿠리에 흰 떡을 가득 담아 놓은 듯 소담스럽게 쌓여있다. 흔한 적설도 진풍경이 되는 곳이다.
이곳에 터를 잡게 된 것은 40여 년 전, 화전민촌을 정착시키고자 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뜻에 따라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이곳에서 생산되는 고랭지채소가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서 1등급 대접을 받고 있다하니 말 그대로 옥토가 된 셈이다.
그리고 안반덕은 한 겨울 적설 풍경과 봄이면 10여 만 평이나 되는 하얀 감자 꽃을 배경으로 전국각지 사진작가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이곳을 트레킹하는 여행상품까지 생겨났다. 이른바 화전민 강제 정착촌이 관광 특화 상품이 된 것이다.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 불과 반세기 만의 일이다.
이곳 고루포기산 남서쪽은 남한에서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평창이요, 인근 발왕산(1.458M) 기슭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용평스키장이 있는 동계휴양지다.
고루포기산(1,238m)에서 ‘대관령 전망대’까지는 능선 길로 20여분, 가까운 거리다. 전망대 올라서니 시원스런 전경이 과연 명소임을 직감하게 한다.
전망대가 본래 갖고 있던 시선(視線)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문득 12세기 중국 북송화가 곽희(郭熙)의 조망술, 삼원(三遠)이 생각나는 곳이다.
가까운 곳에서 먼 산을 바라 본 평원(平遠)으로는 평창군 도암면과 진부면 개활지에 고속도로가 시원스레 뚫려있고, 산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는 고원(高遠)은 북쪽 대관령 목장 위 풍력발전기 은빛날개와 검푸른 동해바다가 펼쳐져 있으며, 산을 앞에서 뒤까지 굽어 볼만한 심원(深遠)으로는 타자(他者)의 입장에서 바라 본 백두대간 최고의 조망처, 계방산(1,577m)과 운두령이 한 눈으로 들어온다.
자연이 펼쳐놓은 풍경도 이곳처럼 열린 곳이 있다면, 닫힌 곳이 있기 마련 눈길을 주는 곳에 따라 느낌도 다른 법인데, 전망대에서 바라 본 풍광은 언제, 어느 곳을 바라봐도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 그래서 전망대가 되었으리라.
대간 길에서 이곳처럼 차마 두고 오기가 아쉬워 발길이 망설여지는 풍경을 만나는 경우는 그리 흔치가 않다. 마음조차 잠시 내려놓고 싶은 곳이다.
멀리 북동쪽 대관령 위로 동해바다를 등에 지고 거대한 날개 짓을 하고 있는 풍력발전단지가 조망된다. 그러나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질 않는다.
그곳은 대관령 목장이 아니더라도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이 그리워지는 곳이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라는 풍광도 안복(眼福)이 있어야 누릴 수 있는가보다. 멀리서 보이는 풍차도, 하늘도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대관령이 가까워 졌음인가.
산 아래 대관령 터널로 들고나는 자동차 소음이 진동을 한다. 발 아래로 지나가는 소리임에 산을 울린다. 능경산까지는 5km 여, 발밑으로 끼어든 자동차 소음은 풍광조차 앗아가고 발걸음을 낯설게 했다.
사람들은 자동차가 던져 준 속도라는 마약에 취해 더 이상 길을 걷지 않아도 된다는 게으른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일까. 길이 편해졌음에도 삶은 더 피곤해졌다고 아우성들이다.
그럴 때마다 사는 일이 난맥을 봉착하면 할 수 있는 것이 기도 밖에 없다 했던가. 그러나 기도는 하지 않고 걱정만 앞세우니, 걱정은 몸과 마음에 상처가 되고, 사람들은 기도조차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 종교사회학자들의 견해다.
능경산(1,123m) 아래, 그런 기도가 모여 돌탑으로 쌓인 곳이 있다.
누가 쌓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나뒹구는 돌 하나를 던져 놓는 것으로 시작했으리라. 제법 형태를 갖추었으나 이제 겨우 반쯤 쌓았을 뿐...돌탑은 아직 미완성이다.
한 때는 티벳의 땅이었지만 지금은 인도북부 라다크 지방에는 유독 불탑이 많다. 수없이 많이 서있는 불탑의 전경은 가히 장관이다. 그곳 라다크 지방 수많은 돌탑의 기원은 죄를 지은 죄수에게 왕은 감금 대신 탑을 쌓을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란다.
죄수의 형량에 따라 탑의 종류와 크기가 달라졌으니 라다크 지방의 탑의 개수나 그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곤 한다. 실제로 죄수들은 탑을 쌓으면서 참회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단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인간적인 교화방법이다. 그렇게 쌓인 돌탑은 부처님 마음이 머무는 곳으로 훗날 유명한 붓다의 마을이 되었다.
그런 돌탑을 보면 기도란 그렇게 미완의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돌탑을 보니 요즘 들어 부쩍 쇠약해지신 어머님 생각이 났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가난한 종갓집으로 시집을 오신 후, 딸만 내리 셋을 낳았었다. 어머님은 오매불망(寤寐不忘) 아들을 점지해주시길 바랬는지 아니면 시집살이가 심했던지, 한남금북정맥인 속리산 천왕봉 기점 46여 km에 우뚝 솟은 선도산(547m)으로 떡시루를 이고 올라 빌고 또 빌었다.
‘앉아서 천리 보시고 서서 만리 보시는 천지신명이시여-‘
어린 내가 듣기에도 어머니의 기도는 구구절절 했다. 그 기도 덕택인지 어머님은 아들 다섯을 얻었고, 그리고 그 아들이 이쯤 장성했으니 이제는 늙으신 어머님을 위해 기도할 때가 되었다.
돌을 들어 탑 위로 올려놓았다. 돌이 모여 탑이 되듯 바라봄도 간절하면 기도(發願)가 된다 했던가, 그렇게 막 쌓은 돌탑도 기도가 되는 곳이 산이다.
이곳 능경산에 서면 강릉(江陵)을 잘 볼 수 있다하여 능경산(稜景山)이다. 그래서인지 산 아래 강릉이 한눈으로 조망된다.
능경산에서 대관령 동쪽으로 산줄기 하나가 힘 있게 뻗어나가 솟구쳐 오른 산이 제왕산(帝旺山, 840m)이다.
고려 말 이성계는 우왕을 공민왕과 요승(妖僧) 신돈의 시녀 반야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며, 강화로 유배시켰다가, 이곳 강릉으로 거처를 옮긴 후, 1389년 아들 창왕과 함께 왕산리에서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때 왕이 살았다하여 지명도 왕산이 되었으며, 그 왕산이 지금의 제왕산이요, 당시 쌓았다는 지금도 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곳이다.
능경산에서 대관령까지는 내리막길은 적설량이 풍족하니 발길을 편하게 잡아준다. 흔히 하는 말로 엎어져도 된다는 쉬운 길이다. 엎어져도 될 만한 곳엔 물맛으로 소문난 샘터가 있었다. 겨울임에도 물맛은 변함없이 좋다. 시원한 맥주 맛 같다.
1미터나 되는 폭설이 내린 것이 벌써 지난 년 말이었는데... 아직도 흠집 하나 없이 고스란히 쌓여있다. 스틱을 꼽으니 그냥 파묻힌다. 아무리 봐도 대단한 폭설이다.
본래 이곳 평창 도암면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적설량이 가장 많은 곳으로, 한 때는 집과 집을 굵은 밧줄로 연결 해놓았다가, 눈이 처마 밑까지 차오르면 밧줄을 돌려 굴을 뚫고 다녔다는 얘기가 낭설은 아닌 것 같다.
드디어 대관령에 도착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 갈 길은 천리 길이다.
고개에 내려서니 말 그대로 아흔 아홉 구비 큰 고개, 대관령(大關嶺)의 웅장함이 바람으로 불어온다.
대관령 바람은 느낌부터 다르다. 이 바람이었던가, 겨울이면 대간꾼들 발길을 유혹하는 거센 바람과 눈으로 유명한 고개, 대관령이다.
그 바람맞이를 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벌써부터 가슴을 설레게 한다.
(08. 4. 13)
저작권자 ⓒ 뉴스울산(nunnews.kr) 무단복제-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