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문 너머, 겹겹의 시간을 걷다.

붉은 문 너머, 겹겹의 시간을 걷다.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만난 세 개의 거리

인천역에 내리자마자 붉은 패루가 시야를 채운다.

도시의 관문처럼 서 있는 그 문을 지나면 곧바로 다른 공기가 흐른다. 불과 몇 걸음 차이인데, 시간의 결이 달라진다. 나는 그 문을 통과하며 여행이 시작되는 소리를 들었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골목은 붉은 색으로 기억된다. 처마 끝에 매달린 등이 바람에 흔들리고, 중국식 간판들이 층층이 이어진다. 중식당 앞에서는 웍을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가 퍼지고, 공갈빵을 굽는 냄새와 월병의 달콤한 향이 뒤섞인다. 그 냄새 속에는 먼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의 시간이 배어 있는 듯하다.

짜장면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 졸업식 날, 이사하던 날, 작은 축하가 있던 날이면 먹던 그 음식. 이곳에서는 그것이 단순한 한 그릇의 음식이 아니라 산둥에서 건너온 이주의 기억임을 실감하게 된다. 낯선 땅에서 뿌리내리기 위해 조금씩 변하고 적응하며 살아냈을 사람들. 골목의 붉은 빛은 어쩌면 그들의 끈기와 닮아 있다.

차이나타운 안쪽으로 걷다 보면 삼국지 벽화거리가 이어진다. 벽면을 가득 채운 영웅들의 모습이 지나가는 이의 발걸음을 붙든다. 그 길 끝에는 인천 화교역사관이 자리한다. 전시관 안에는 화교 이주 역사와 생활사가 조용히 정리되어 있다. 사진 속 인물들의 눈빛을 마주하니 ‘타향’이라는 단어가 쉽게 발음되지 않는다. 이곳은 누군가에게는 생계를, 누군가에게는 가족을, 또 누군가에게는 다음 세대를 남긴 삶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차이나타운을 벗어나 인근 골목으로 방향을 틀면 분위기는 또 달라진다.

개항장 일대에는 일본식 목조 건물들이 남아 있는 거리가 따로 형성되어 있다. 1920~30년대 상가주택 구조의 흔적이다. 격자무늬 창과 짙은 목재 외벽, 경사진 지붕을 얹은 2~3층 건물들. 붉은 색채가 지배하던 골목과는 결이 다른, 차분하고 묵직한 시간이 흐른다. 같은 동네 안에서도 골목은 저마다 다른 시대를 품고 있다. 한 발 옮길 때마다 장면이 바뀌는 영화 세트장처럼, 그러나 이곳은 실제로 사람들이 살아낸 역사다.

그리고 다시 몇 분을 걸으면 송월동 동화마을이 펼쳐진다.

알록달록한 벽화와 동화 속 장면들이 골목을 채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공간을 밝힌다. 근대의 기억이 머물던 거리와는 또 다른 색채의 세계. 차이나타운, 일본식 건물이 남은 개항장 거리, 동화마을은 서로 다른 골목에 자리하고 있지만, 천천히 걸으면 하나의 동선으로 이어진다.

나는 그 길을 오가며 생각했다.

이곳은 세 개의 테마 거리가 아니라, 세 겹의 시간이 나란히 놓여 있는 공간이라고. 붉은 문으로 시작해 목조 건물의 그림자를 지나, 동화 같은 색채로 이어지는 길. 과거와 현재, 그리고 기억과 상상이 한 도시 안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생각보다 오래 그 골목에 서 있었다."

해 질 무렵 다시 인천역 앞에 섰다.

처음 마주했던 붉은 문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들어설 때는 여행자였지만, 나올 때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품은 사람이 된 기분이다.

여행은 멀리 떠나는 일이 아니라,

한 도시의 시간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이 붉은 문 너머에서 배웠다.

윤원지 기자 (myab11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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